수천억짜리 '슈퍼카'를 샀는데, 매뉴얼이 없다면? - 플랜트 베테랑이 본 대한민국 데이터센터 시운전(Cx)의 불편한 진실
2026. 02. 04. 16:19

잠들지 않는 거인의 숨결-18년 차 엔지니어가 낸 데이터센터 무중단 운영의 해답 3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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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센터는 ‘무중단’이라는 숙명을 안고 태어나는 시설입니다. 그래서 시운전에 막대한 시간과 자원을 쏟아붓습니다. 하지만 플랜트 건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HVAC 엔지니어로서, 지난 3년간 데이터센터 업계로 넘어와 목격한 시운전 현장은 한마디로 "화려하지만 실속 없는 잔치"였습니다.
수천억 원을 호가하는 최첨단 데이터센터를 짓고도, 정작 운전대를 잡을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된 지도'조차 주지 않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투자자들의 돈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세 가지 '구멍'을 고발합니다.
1. '나무'만 가르치고 '숲'은 모르는 교육 (Silo Training)
가장 황당한 것은 운영자 교육 방식입니다. 현재의 시운전은 통합연동테스트(IST, Integrated System Test)를 수행하면서도, 정작 교육은 '각개전투' 식입니다. 냉동기 따로, UPS 따로, 개별 장비 사용법만 가르칩니다.
운영팀에게 필요한 건 "이 버튼을 누르면 켜집니다"가 아닙니다. "이 장비가 멈췄을 때, 전체 데이터센터의 온도와 습도가 어떻게 변하며, 시스템적으로 어디를 막아야 서버가 죽지 않는가?"라는 거시적 인과관계입니다. 전체 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병사에게 총기 분해 결합만 가르쳐 놓고 전쟁터로 내보내는 꼴입니다. 숲을 보지 못하는 엔지니어는 위기 상황에서 '골든타임'을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2. 시스템 매뉴얼의 부재: 조립 설명서 없는 레고 블록
글로벌 표준인 ASHRAE Guideline 0은 '시스템 매뉴얼'을 시운전의 헌법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한국의 데이터센터에는 '진짜 매뉴얼'이 없습니다.
있는 것이라곤 장비별 자동 운전 시나리오인 SOO(Sequence Of Operation) 뿐입니다. 이것은 장비가 언제 켜지고 꺼지는지에 대한 '조건문'일 뿐, 전체 시스템의 '운영 철학'이 담긴 지침서가 아닙니다. 문제 발생 시 운영자가 참고할 '트러블 슈팅 가이드'가 없다는 뜻입니다. 전체 계통도도, 시스템 매뉴얼도 없는 상황에서 운영팀은 매일매일 살얼음판을 걷습니다. 이는 결국 고임금의 '슈퍼맨' 엔지니어를 채용해야만 해결되는 구조를 만들어, 운영비(OPEX)를 불필요하게 상승시키는 주범이 됩니다.
3. 한여름 성능 테스트 실종: 겨울 패딩만 입어보고 여름을 논하다
HVAC 시스템의 존재 이유는 '폭염'을 견디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부하가 높은 혹서기 성능 검사(Seasonal Testing)는 슬그머니 생략됩니다. 내가 가진 설비가 40도의 폭염 속에서 어디까지 버티는지(Max Capacity) 확인조차 안 하고 "이론상 문제없음" 도장만 찍습니다. 최고 속도로 달려본 적 없는 레이싱카를 믿고 서킷에 나가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극한의 상황에서 내 시스템의 여유율(Margin)을 모른다면, 그 어떤 운영 계획도 사상누각일 뿐입니다.
결론: '턴키(Turn-Key)'의 열쇠는 녹슬어 있다
해외 플랜트 프로젝트에서 말하는 '턴키(Turn-Key)'는 말 그대로 열쇠만 돌리면 모든 시스템이 유기적으로 완벽하게 돌아가는 상태를 뜻합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데이터센터는 열쇠는 받았는데, 시동을 거는 법도, 비상시 대처법도 모호한 상태로 인도되고 있습니다.
투자자 여러분, 당신들이 쏟아 부은 천문학적인 돈이 '부실한 시운전'이라는 구멍으로 새어 나가고 있습니다. 스페어 파트(예비 자재)조차 준비되지 않은 현장,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 운영팀... 이 모든 리스크는 결국 "한국 데이터센터는 믿고 맡기기 힘들다"는 글로벌 경쟁력 저하로 귀결될 것입니다.
시행사와 시운전 업체가 '돈 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감시하십시오. 화려한 준공식보다 중요한 것은, 폭염과 정전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진짜 시스템'을 인수받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