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억짜리 최첨단 데이터센터, '이것' 없으면 깡통이다? - 자동제어 18년 차 엔지니어가 전하는 '넘버링 튜브'의 미학
2026. 02. 04.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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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제어 판넬과 씨름하며 보낸 세월이 어느덧 18년입니다. 강산이 두 번 가까이 변하는 동안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AI가 코딩을 하고 로봇이 서빙을 하는 세상이니까요.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데이터센터 운영팀에서 바라본 우리나라 자동제어의 '마감 품질'은 왜 여전히 1990년대에 머물러 있을까요?
오늘 저는 엔지니어의 수명을 갉아먹는 주범, 작지만 치명적인 '넘버링 튜브(Numbering Tube)'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1. 구리선 미로 속의 '숨은그림찾기'
혹시 '넘버링 튜브'를 아십니까? 전선의 양 끝단에 "나는 어디서 와서(From), 어디로 간다(To)"를 적어놓은 일종의 명찰입니다. 플랜트 현장에서는 이 'From/To' 표기가 헌법처럼 지켜집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요? 수백, 수천 가닥의 전선이 얽혀 있는 자동제어 판넬 문을 열어보면, '무기명(No Name)' 전선들이 국수 가락처럼 쏟아집니다. From/To 정보는 고사하고 튜브조차 없는 '알몸 전선'을 마주할 때면, 유지보수를 해야 하는 운영팀은 절망에 빠집니다.
이건 마치 서울역 광장에서 "김 서방을 찾아라"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전선의 반대편 끝을 찾기 위해 판넬 안을 헤집으며 몇 시간을 허비하다 보면, '우리가 지금 최첨단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건가, 아니면 고물상에서 보물찾기를 하는 건가' 하는 자괴감마저 듭니다.
2. 수천억을 태우고도 '튜브'에 무릎 꿇다
데이터센터 하나를 짓는 데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갑니다. 시공사, 감리, CM 등 수많은 전문가가 달라붙어 검증을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거대한 시스템의 신경망인 '자동제어 전선'의 이름표가 없는 건 아무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웃픈(웃기고 슬픈)' 현실이 벌어집니다. 수천억짜리 데이터센터가, 고작 자동제어 전선 하나가 끊어졌는데 복구하는 데 며칠이 걸립니다. 원인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 선이 어디로 가는 선인지 찾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코미디가 아닐까요?
3. '자동제어'는 깍두기가 아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요? 건축, 기계, 전기, 소방 같은 '덩치 큰' 형님들 챙기느라, 막내인 '자동제어'는 뒷전으로 밀려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비싼 하드웨어도 뇌와 신경망(자동제어)이 없으면 고철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운영 관점을 배제한 시공은 결국 시한폭탄을 안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4. 해결책은 단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
이 거대한 비효율을 끝내는 방법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합니다. 프로젝트 초기, 시방서(Specification)에 딱 한 문장만 추가하십시오.
"모든 제어 전선에는 반드시 From/To 정보를 기입한 넘버링 튜브를 부착해야 한다."
이 한 문장은 마법의 주문이 됩니다. FAT(공장인수시험)나 시운전 때, 튜브가 없는 전선을 당당하게 지적할 수 있는 강력한 '명분(Contractual Basis)'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시방서 위반은 계약 위반입니다. "바빠서 못 했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게 만드는 힘, 그것은 꼼꼼한 시방서에서 나옵니다.
5. 동료 엔지니어들에게 고함
사랑하는 선후배, 그리고 동료 엔지니어 여러분. 우리의 목표인 '무중단 운영(Zero Downtime)'은 기도한다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디테일에서 나옵니다.
수천 개의 전선 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시방서를 펼치십시오. 그리고 펜을 들어 '넘버링 튜브' 조항을 꾹꾹 눌러쓰십시오. 그 작은 튜브 하나가, 훗날 닥쳐올 야근과 비상상황에서 여러분을 구원할 것입니다.
기본을 지키는 것, 그것이 가장 확실한 혁신입니다.